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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실의 가법과 삼강오륜K-리더십: 정조의 군주론
이영관 순천향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  |  sch-uni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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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5.02  09: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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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조대왕 어진 / 세로175cm× 가로110cm / 수원 효행기념관 소장

무인보다 문인을 우대했던 조선왕조는 불교를 중시했던 고려왕조와 달리 유교적인 통치이념 하에 충과 효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백성들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못지않게 중시했지만, 왕실에서는 어른을 공경하는 효 문화를 가법의 중심에 두었다. 본래 가법이란 한 집안의 법도나 규율로서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유교적인 신분질서 하에 나라를 다스렸던 조선의 왕들은 왕실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어야만 했다. 어른을 공경하고 섬기는 효 문화는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왕실에서 위계질서를 정립하는 기반이 되었고, 왕가의 안정을 도모하며 백성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금은 효의 가치를 존중하고 실천함으로써 만백성의 어른으로서 왕의 권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하들이 군주를 섬기는 충은 한 집안에서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섬기는 효 문화와 일맥상통한다.

조선사회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즉 스스로 자신을 수양하고 가족(가문)을 올바로 이끌 수 있어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유교의 가르침을 중시했다. 그래서 충과 효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포상제도는 임금의 주요한 관심사항일 수밖에 없었다. 1783년(정조 7) 1월 23일 정조는 대신들과 예조 당상을 불러 서울과 지방의 효자와 열녀의 행실이 있는 사람들, 즉 충신 2명, 효자 3명, 열녀 60명, 효부 3명, 효녀 1명에게 차등하여 포상하라고 명하였다.

“각 도에서 올린 효열에 관한 장계를 열람해 보건대, 상주의 작고한 선비 이제화의 딸 이씨의 행실이 특이하니, 매우 가상하다. 게다가 이씨는 어진 신하였던 이황의 8대손이라고 한다. 법도가 있는 가문에 이러한 효녀가 있으니, 조정이 옛날을 생각하는 방도에 있어서 더욱더 높이 권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씨가 시집가기 전에 죽어서 은전을 베풀 곳이 없으니, 이제화의 아들이나 손자 중에서 벼슬할 만한 자가 있는지 본도에 물어보되, 이름을 지적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그리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처음 벼슬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쓰게끔 하라.”

정조는 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도 부강한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통치기반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을 발전시켜 조선사회를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키려 했지만, 유교적인 신분질서가 위협받는 상황을 극복해야만 했다. 조선 후기에는 농기구의 개량과 농사짓기 위한 수리시설의 확충 등으로 인해 일부지역에서는 농업생산성이 크게 개선되었지만, 소작 농민들의 삶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신분질서가 흔들린다면 임금의 권위와 위상은 자연스럽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오륜행실도』를 발행함으로써 급변하는 사회변화 속에서도 삼강오륜의 중요성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갔다. 그는 세상의 변화를 간파했고, 나라를 발전시키면서도 성리학적 가치관이 퇴색되지 않는 개혁노선을 추구하였다. 『오륜행실도』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중종대에 편찬된 『이륜행실도』의 내용을 중시하면서도 18세기의 사회변화를 반영하여 완성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핵심사상인 인仁의 가치와 효를 실천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당시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관계를 오륜이라 하였는데, 이는 유교의 기본윤리에 해당된다. 삼강이란 오륜 중에서 부자, 군신, 부부의 윤리를 강조한다.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428년(세종 10) 9월 27일자의 『세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18세기의 조선사회는 농업국가의 기틀 속에서도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사회질서가 곳곳에서 위협받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당시 가난한 양반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위세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화폐경제의 확산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서학의 확산에 따라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위협받던 시대상황 속에서 효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효치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불만세력을 잠재우며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성과를 일궈냈고, 『부모은중경』과 『오륜행실도』의 간행을 통해 실효성을 제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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