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영조) 앞에서 세손(정조)은 속마음을 숨긴 채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소임에도 빈틈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는 24세 때부터 대리청정을 수행하다 이듬해인 1776년에 등극했지만, 세손시절뿐만 아니라 즉위 후에도 암살 위험에 시달렸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노론 벽파는 정조가 즉위한 후에도 조정의 주요한 요직들을 독차지하였고, 노골적으로 정조를 탄핵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준비된 임금이었고 그의 비범함은 신하들의 삐뚤어진 탐욕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가 조선 후기를 빛낸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체계적인 왕위계승교육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유교의 성학사상을 중시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덕을 베풀고 민심을 얻어야만 권력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왕권국가의 기틀이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1636년(인조 14)에 발발한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주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사림세력의 영향력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이후 힘없는 백성들의 삶은 건국 초기보다 못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전국 각지의 사대부들은 파벌을 형성하며 국가발전을 이끌기 위한 논쟁보다는 중앙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피 말리는 암투가 지속되었다. 상대적으로 왕권은 점점 더 무기력해져 갔고, 보위에 오르는 왕들의 정통성도 흔들리면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사도세자의 부친인 영조는 1724년에 즉위하면서부터 경종 독살설로 인해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모친의 신분이 미천해 군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했다. 왕위계승 교육은 조선 초기부터 엄격했지만 영조대의 왕세자 교육은 상식을 뛰어넘을 만큼 혹독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조선왕조에서 세자를 교체하여 성공한 예는 세종과 정조가 대표적이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영조는 사도세자의 모범적이지 못한 행동에 대노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도 양녕대군은 풍류를 즐기며 천수를 누렸지만, 사도세자는 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영조는 왕세자의 본분을 망각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스스로 못질을 할 만큼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신권에 농락당하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고, 주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세손인 이산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사도세자와 달리 세손(정조)은 왕세자로 책봉된 후 영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처형한 영조를 원망하며 비행 청소년이 될 수도 있는 환경이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세손을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세손(정조)은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영조)를 원망할 법도 한데, 영조와의 관계가 좋았다. 혜경궁 홍씨는 세손이 영조를 만날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지만, 세손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게 만들 만큼 다정다감했다.

정조어필첩(正祖御筆帖), 상권(上卷)은 86면으로 기미(己未, 1799) 8월 7일~9월 25일, 하권(下卷)은 68면으로 경신(庚申, 1800) 정월 1일~4월 28일까지의 어필 서신이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