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왕세자에 있을 때에 조재한이 한 부류의 불평불만을 일삼는 무리들과 함께 임오년의 의리를 가장하고서 몰래 요망한 환관 이흥록·김수현 등과 결탁한 것이 임금에게 들렸는데, 이흥록 등이 임금이 후원에서 거니는 것을 틈타 오만 가지로 유혹하고 위협하다 그들의 당에 들어온 불량배들을 추천하였다. 정조가 그 때에 어린 나이이었지만 마음에 미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상(임금의 상사)을 틈타 조재한이 시골선비인 이일화를 사주하여 임오년의 일을 말한 상소를 올리게 하고, 이덕사의 상소도 같은 날에 올라오고, 유한신도 또한 상소를 승정원에 바쳤는데, 상소의 말이 똑같았다.

이들을 처형하며 정조가 내세운 근거는 선대왕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선대왕을 모함하는 대역이다. 비록 국상으로 공적인 업무를 중지하는 기간이지만, 마땅히 궁전의 뜰에서 친히 국문하여 선대왕의 영령에 고하겠다. 이일화는 오히려 외로운 놈이고, 이덕사를 정법(사형 판결)한 연후에야 선왕의 뜻이 밝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된 상소는 지속되었지만, 정조는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서두르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중대로 행할 수는 없었다.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음해하여 죽게 만든 사람들을 모두 칼로서 엄하게 다스렸다면 정국은 극심한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것이고, 적대적인 세력들은 쿠데타를 통해 임금을 바꾸려 했을 것이다. 아닌 ‘군’으로 기록되는 수모를 겪었다.

최고경영자는 즉흥적인 의사결정을 경계해야 하며, 자신이 추진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조직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상황 하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함에 있어서 명분을 중시했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가 사도세자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꺼렸던 영조의 명을 거역하게 되면 노론 세력의 공격은 거세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다만 정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단계적으로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전심전력했다.

마침내 1776년(즉위년) 9월 30일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경모궁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창의궁에 나아가 왕의 신주를 모신 수레가 태묘로 떠날 때 드리는 제사인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고, 신주를 모신 가마를 받들어 도로 봉안하고 제례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경모궁은 경성 동부 숭교방에 있었는데, 영조 갑신년(1764) 봄에 처음으로 북부 순화방에 세웠다가 여름에 옮겨 건립하고는 ‘수은묘’라고 칭호하였다. 임금이 즉위한 뒤로는 도감을 설치하여 개건하였는데, 4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에 완공하였으며, 경모궁이라고 칭호하였다.”

순리란 계곡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이치와 같다.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여론은 분분했다.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에 반대하는 노론 벽파를 힘으로 누르는 접근법은 극심한 정쟁을 불러올 수 있고 선왕인 영조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신계와 달리 불완전하다. 최고경영자는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여론의 추세를 고려해가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이끌어내야 한다. 추진할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조급하게 처리하다 보면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임금의 의중을 꿰뚫고 있던 남인 시파는 정조가 즉위한 지 16년 후인 1792년(정조 16) 윤4월 27일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만인소를 통해 정조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경상도의 유학자 이우 등 1만 57인은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사람들을 처벌하고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1856년(철종 8)의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정조 16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를 이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 요구하는 만인소),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동년 5월 24일에도 우의정 박종악이 유성한의 일(만인소)로 재차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그를 파직하였다. 세상살이는 진실과 거짓이 대립하는데 정치세력 간에 벌어지는 진실게임은 때때로 사건의 본질보다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정조는 노론 벽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남인 세력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사도세자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노론 벽파에 대한 탄압에는 소극적이었다.

정조는 영남 남인들의 만인소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복권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정적들을 견제하며 규장각을 설치하여 친위세력을 양성하면서도 경상도는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킨 고장이고, 무신란 때는 역적인 이인좌에 동조하지 않고 나라에 충성한 곳임을 천명하였다.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푸는 일은 너무도 간절하고 시급한 사안이었지만, 만백성을 책임지고 있는 국왕으로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을 앞세워 함부로 정치적인 탄압을 할 수는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파직할 정도로 원칙과 명분을 중시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판에서 임금이 정치노선이 다른 신하들에게 허점을 보인다면 왕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영남 남인들의 만인소는 정조 즉위 16년(1792)의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정조가 노론 벽파를 얼마나 경계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