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왕권국가였지만 군주가 군대의 통솔권을 제어하지 못하면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는 힘없는 군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선왕인 영조는 병조에서 오군영 대장의 임명을 추진하도록 조치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노론 실세들이 무반 벌족과 결탁하여 군영대장을 발탁하는 관행이 지속되었다. 노론세력을 견제하는 것 못지않게 오군영의 대장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정조는 언제라도 쿠데타로 쫓겨나거나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군 통수권을 회복하기 위한 해법 도출에 몰두했지만 단기간 내에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상하간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군문화의 특성을 고려할 때, 단시간 내에 오군영의 대장들을 정조가 원하는 사람들로 교체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무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으면서도 점진적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가는 해법 도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조는 임금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확대하며 자연스럽게 오군영의 권한을 축소해나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왕의 직할부대인 장용영이 창설되자 오군영의 핵심 기능들은 점진적으로 장용영으로 이관되었지만, 무반의 영수인 훈련대장 구선복은 정조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 사도세자를 모욕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쉽사리 구선복을 제압하지 못할 만큼 오군영에 대한 구선복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정조 즉위 후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던 구선복은 임금이 지속적으로 오군영의 영향력을 약화시키자 임금을 교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의 역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1786년(정조 10) 12월 9일에 능지처사를 당했다. “군사를 장악한 권한을 바탕으로 불량한 무리들을 불러 모았는데, 부하는 변방의 장수로부터 장교에 이르기까지 안팎에다 배치해 두었으며, 재화는 긁어 모아 널리 뇌물을 주고 틈을 엿보며 좌우로 발걸음하였습니다. … 5월과 9월 이후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이 기회를 틈타야겠다고 여겨 유언비어를 선동하여 인심을 어지럽게 하였는데, 화의 덫이 순간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관련 법규를 검토한 후 구선복의 처자를 처벌하였다. “효시는 군법이고 처자를 종으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의금부의 법이다. 사건이 각각 다르니,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노비로 삼고 노비와 전택은 관청에 예속 시키도록 하라.” 구선복은 사도세자를 능멸한 자였지만, 정조는 즉위 후 10여 년간 구선복의 부귀영화를 지켜보며 단죄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구선복에 대한 징계가 지연됨으로써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가 독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위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사결정권자는 외유내강의 리더십으로 조직의 안정을 추구하며 혁신의 길로 나아가야 하지만 의사결정의 타이밍이 잘못되면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후 장용영 창설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정조에 충성하는 인물들이 장용대장을 맡으며 왕권 강화를 뒷받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