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판결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엄격한 법의 적용보다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합당한 명분이 있으면 감형하는 판결을 선호했다. 1791년(정조 15) 9월 20일 호서의 살인사건 죄수인 김계손 형제에 대한 충청감사의 보고내용을 살펴보자. “그들의 아비가 남의 발길에 채여 하룻밤에 죽었으므로 고발하여 옥사가 이루어졌으나 그 원수가 곧 풀려나 도망쳐 숨어버렸습니다. 김계손과 그 아우 김성손은 쇠꼬챙이와 단도를 소매 속에 숨기고 한 해를 넘게 그 뒤를 추적하여 노성 땅에서 찔러 죽였습니다.”
충청감사의 보고를 받고 정조는 고뇌 끝에 전교하였다. “이 문건을 보건대, 그 효성은 극히 감동스럽고 그 사정은 극히 측은하고 그 마음은 극히 애달프고 그 정성은 극히 가련하고 그 뜻은 극히 칭찬할 만하다.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더라도 법에서는 마땅히 용서해줄 일인데 하물며 형제 두 사람이 이 다섯 가지 뛰어난 행실을 갖추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 충청 감사에게 분부하여 즉시 계손 등을 석방하고 감영으로 불러들여 판부(임금의 판결)한 것을 베껴주는 동시에 원거주지인 전주목에 넘겨주도록 할 것이며 또한 감사에게 그의 처지를 살펴보아 특별히 거두어 등용하도록 하라.”
오늘날에는 살인을 하게 되면 엄한 처벌을 받지만, 정조는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보복살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판결하였다. 살인사건을 판결할 때는 군주의 통치철학과 법률에 따른 것이지만 민심의 동향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의 판결에 대해 백성들은 불만을 표출하기보다 올바른 판결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조실록』에는 다양한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사람을 죽인 80세 된 김보동의 석방 판결도 눈길을 끈다.
1797년(정조 21) 5월 12일 김보동은 함께 술을 마신 누이의 아들인 이수남을 때렸는데, 수남이 잠을 자다 죽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정조는 매우 흥미로운 판결을 내렸다. “80세 된 늙은 외삼촌이 60세 된 병든 생질을 때렸으니 한마디로 말하면 죽은 것이지 죽인 것은 아니다. 늙은 사람은 다행스럽게 살았고 병든 사람은 지레 죽은 것인데 어찌 손힘이 이쪽은 세고 저쪽은 약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만일 마음씀이 아주 사리에 어긋남이 없으면 또한 법에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 옥에 가둘 필요가 없으니 보동을 석방하도록 하라.”
그러나 정조는 살인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관리의 무능함이나 잘못된 조치에 대해서는 엄단했다. 1793년(정조 17) 5월 12일에는 전 부사 구순의 살인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충청도 병마절도사인 이광섭을 파직하고 구순을 심문하도록 조치하였다. 관찰사 이형원의 장계에 따르면, “청주 덕평에 사는 전 부사 구순이 도적을 맞고는, 순의 집 이웃에 사는 반족인 김명신을 도적의 괴수라고 말하여, 병영에서 김명신을 잡아다가 달포 이상을 가두어 두고 조사를 하였으나 끝내 확실한 증거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밖에 무고한 평민들도 많이 모진 형벌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전 부사 구순에 대해 정조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였다. “약간 도적을 맞고서 숫자를 많이 불리어 관아에 고발하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도적을 맞지도 않고 도적을 맞았다고 말한 것이야말로 그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도에서 올린 장계와 조사 문건이 저와 같이 명백하니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돌릴 수가 없다. 또 더구나 김명신이라는 사람이 원통함을 품고 죽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병들어 죽었는지의 여부는 막론하고 원통함을 품은 것은 사실이요, 구순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미 이 사실을 듣고서야 어찌 예사로 보아넘겨서 지레 처단할 수 있겠는가.”
상업이 발전하고 신분제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던 18세기의 조선은 이전과 달리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던 시기로서 살인사건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을 내려야 하는 군주의 역할은 막중했다. 살인사건에 관한 정조의 판결문을 정리한 『심리록』에는 백성들을 사랑했던 군주의 고뇌와 억울한 백성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그의 간절함이 곳곳에 묻어난다. 하지만 성군이라 불리는 정조도 신분이 천한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793년(정조 17) 12월 18일 정조는 “노비가 상전을 무고하지 못하도록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토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신분이 천한 사람들의 인권 유린은 심각했고, 임금마저도 사회적 약자의 억울한 죽음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노비에 있어서는 상전에게 이미 죽이고 살리는 것을 허용하였으니, 관아에 고하지 않은 법을 적용하여도 태장을 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이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조선왕조의 기득권 세력들은 스스로 사회적인 약자들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형벌제도가 오늘날의 법체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세상의 민심은 범죄자에 대한 정의로운 판결을 갈망하며, 정의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시대와 장소와 종교적 신념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범죄자를 엄하게 처벌하기보다 범죄자의 처지를 살피고, 조선사회를 지탱하던 성리학적 이념과 유교윤리, 그리고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고려해 감형이나 무죄판결을 이끌었던 성군 정조의 리더십은 대립과 반목을 치유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