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은 정조의 즉위가 험난했음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1775년(영조 51) 11월 20일 영조는 집경당에서 대신들을 초대하여 『어제자성편』, 『경세문답』을 진강하도록 명하였다. 동궁(정조)과 영돈녕부사 김양택, 영의정 한익모, 판부사 이은, 좌의정 홍인한, 우부승지 안대제, 가주서(정7품 주서) 박상집, 기사관(춘추관의 관직) 서유련·성정진 등이 참석하였다. 이 때 홍인한이 ‘삼불필지설’을 주장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정에서 하는 일까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홍인한의 주장에 힘을 보태자, 영조는 홍인한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지 않았다. 당시 영조는 국정운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고, 노론의 주장을 임금의 권위로 제압할 수 없을 만큼 왕권은 신권에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심은 세손(정조) 편이었다. 세손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반대하던 세력을 제압하는 데는 홍국영과 함께 서명선의 역할이 컸다.

홍인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동생이며, 1753년(영조 29)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공조·이조·병조의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그는 정조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화완옹주(영조의 서녀)의 양자인 정후겸과 결탁하여 세손(정조)를 모함하였고 노론 벽파에 가담하여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결과, 정조 즉위 후 고금도에서 유배생활하다 사사되었다.

역사적으로 패망한 사람들은 출세에 눈이 멀어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높은 곳에 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부메랑을 던져 상대방을 타격하는 것을 즐기지만 때가 되면 보다 강한 힘으로 부메랑이 되돌아오는 인과법칙을 간과한다. 정조는 살해의 위협 속에서 생활해야 했던 세손시절부터 자신에게 충성하는 참모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홍국영을 숙위 대장으로 삼고 대장이 차는 대장패·전령패의 격식을 정했다는 기사 『정조실록』 4권, 정조 1년 11월 15일 정축 2번째 기사

홍국영은 정조의 세손시절과 즉위과정, 그리고 집권 초반기에 임금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을 제압하며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세손(정조)은 정적들로 인해 임금이 될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홍국영은 정조를 보필하는 데 앞장서며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실력이 출중해도 지나치게 신중한 의사결정으로 인해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는데, 홍국영의 정세 분석과 대응전략은 비범했다.

정조는 금군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도 숙위소에게 공백을 메꿀 수 있도록 제도화함으로써 자신의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는 1777년(정조 1) 11월 15일 숙위소의 중책을 신임이 두터웠던 홍국영에게 맡겼다. 숙위소를 건양문 동쪽에 설치하고, 금위대장 홍국영을 숙위대장으로 삼았으며, 숙위대장이 차는 대장패와 전령패의 격식을 정하였다.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대리청정 기간에 동궁(정조)을 보호하는 데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정조의 즉위와 정적 제거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정국이 안정되자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지렛대 삼아 자신의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누이동생이 정조의 후궁인 원빈이 되면서 홍국영은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의 야심은 중종의 후원 하에 훈구세력을 제압하며 영향력을 확산시켰던 조광조의 삶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홍국영에게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왔다. 그의 누이동생인 원빈이 1779년(정조 3) 5월 7일에 죽었기 때문이다. 홍국영은 원빈이 독살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궁인들을 잡아다 취조하는 등의 조치로 인해 정조와 대왕대비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시 홍국영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지만 정조는 원빈의 독살설에 대한 원인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홍국영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정조의 신임이 식어가자 그는 정조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궁궐에서는 홍국영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숙위소에서 역모를 꾀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비록 홍국영이 원빈 사후 비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늘 쿠데타를 경계해야 했던 정조의 조급증이 맞물려 홍국영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만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군주로서 정조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서슴지 않던 홍국영을 바라보며 처음에는 묵인하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신하들을 다독였지만, 금도를 넘어섰다고 판단되자 홍국영을 내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홍국영의 불명예스런 퇴진은 2인자 리더십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되새겨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