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인을 우대하며 신분제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왕조는 계층 간의 의사소통을 촉진시키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정조가 즉위한 18세기 후반기에는 전통적인 유교질서가 다방면에서 위협받았고, 서양사상의 유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억압돼 있던 하층민들의 욕구 불만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당시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힘없는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호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원활하게 소통하려면 국왕이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정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에 고뇌하면서도 정치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일류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가 추구했던 탕평정치는 정치노선을 달리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당파를 초월하여 우수한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신권에 눌려있던 왕권을 바로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붕당간의 대립이 격해지면 국익이나 공동선을 지향하기보다는 이해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풍토로 인해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정조는 붕당정치의 근간을 흔들기보다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 세력들의 기를 살려주며 국왕이 주도하는 정치개혁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는 왕권의 정통성을 바로 세워야 하는 난제 속에서 천명이라는 추상적인 이념보다는 민심을 이끌어내는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백성들과의 소통이 원활해야만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고, 신하들과의 폭넓은 교류와 사회적 약자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최고 지도자의 권력기반은 백성들과의 소통이 원활해야만 공고해진다. 당시 힘없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최고 권력자인 임금을 만나 소통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금을 어려워하는 백성들과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당시 임금의 행차는 멋진 이벤트였고 백성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정조 일행이 저작거리에 등장하면 백성들은 땅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면서도 마냥 즐거워했다.

그는 선왕들의 능에 참배하는 등의 목적으로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면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당 지역의 관료들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임금이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살펴보기 위해 거둥하는데 민폐가 발생한다면 군주와 백성의 소통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조는 1790년(정조 14) 이후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융릉) 참배를 위해 거둥할 때는 수원과 과천 일대의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당부했다. 1793년(정조 17) 12월 9일에도 정조는 연례행사인 현륭원의 거둥 기일에 대해 전교하며 백성들의 수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차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민심의 동향을 중시하는 정조에게 사실대로 보고하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걱정거리를 액면 그대로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현대경영의 관점에서도 최고경영자의 비전이 아무리 멋지더라도 조직 구성원들은 조직 전체의 이익 못지않게 개인적인 수고에 따르는 충분한 보상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CEO가 추진하는 신사업에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본래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존재로서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지만, 멋진 이타주의자가 아니라면 사익을 침해당하면서까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정조가 조선 후기를 빛낸 성군으로 칭송받는 것은 개혁을 방해하는 온갖 공작에도 불구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는 탄탄한 논리와 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늘 약자의 처지를 어루만지며 국익을 우선시하면서도 왕권 강화의 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추구했던 ‘대동사회’는 지역 간 소통과 계층 간 소통을 중시했다. 그는 특권층과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요직을 독차지하거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도 서울 사람들이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을 극도로 경계했고, 전국 각지의 우수한 인재들을 차별없이 등용할 것과 유능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던 제도와 관습을 개선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