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집권 후반기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실용적인 학풍을 지닌 지식인들은 서학을 수용하여 조선 사회의 단점들을 개선하고자 했다. 정조 또한 선진화된 서양의 과학기술에 큰 감명을 받았고, 조선사회의 난제인 농업과 상업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정치란 여론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분리하여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은 서학을 수용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되었다. 천주교를 배척하며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서학을 전해주는 천주교인들의 종교적 가치관을 배제한 채 과학기술만을 수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정조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유교 경전의 뜻을 해석하거나 연구하는 경학의 신봉자였기에, 과학기술을 수용하더라도 경학의 하위영역 차원에서 받아들이려 했다. 결국 18세기 후반기의 조선사회는 서학의 도입과 연구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어려운 장애물들이 곳곳에 잠재해 있었다.

결국 왕권과 대립하며 붕당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관료들은 천주교인들의 탄압을 통해 붕당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정조는 경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정도를 추구하지 않고 과거시험 등 출세를 위한 임시방편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곤궁해져 서학에 빠져든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다른 종교나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는 것이 어찌 서학뿐이겠는가. 중국의 경우 육학, 왕학, 불도, 노도老道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언제 금령을 설치한 적이 있었던가.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오로지 유생들이 글을 읽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일일 뿐이다. … 근래 문체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서학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무엇보다도 정조 집권 후반기에 대두된 천주교의 확산은 노론 벽파와 정조의 후원 하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남인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정조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전해주는 천주교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서학과 천주교를 분리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처지에 고뇌했다. “서양학이란 것이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속이고 현혹시키는가?” 당시 국정의 중심세력인 노론 벽파는 전통적인 유교이념과 성리학적인 통치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논란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정조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성리학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신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군주를 부정하는 천주교의 교리 때문에 서양학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남인을 이끌고 있던 채제공은 임금을 부정하는 등 조선 사회의 현실에 위배되는 교리 때문에 서양학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천주교인들을 엄하게 처벌하는 접근법에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신유박해 사건, 천주교 탄압의 서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출처: the columnist, “서학의 좌절, 과학기술 근대화의 기회상실‘

그러나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여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은 되돌리기 어려운 수순에 돌입했다. 본래 진산사건은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윤지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면서 신주를 세우지도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납득이 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전국 각지의 유생들은 천주교도인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였고, 결국 이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신해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천주교 탄압의 서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당시 채제공은 온건한 방식으로 천주교인들을 처리할 것을 간곡히 주장하였다. 자리를 함께 했던 좌참찬 김화진과 수어사 정창순은 채제공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정조 또한 대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백성들에게 미칠 천주학의 해악을 걱정하면서도 조선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내려면 서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 하더라도 민심을 저버리고 개혁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다. 상업활동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한 양인이나 천민들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남달랐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던 이들의 욕구 불만도 사회의 안정망을 위협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동안 남성들에 의해 억압받던 여성들의 권리문제도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차별들에 대한 근원적 해법의 사상적 논리를 제공한 천주학은 불평등한 세상을 개혁하기 원하는 민초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백성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중시한 정조였지만 천주교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접하며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노론 중심의 탕평정치를 펼친 영조와 달리 능력있는 선비라면 누구라도 발탁하여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던 정조였지만,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온전한 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신분차별에 신음하던 고달픈 백성들을 방치할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서학의 역기능을 우려하면서도 신분제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서학 연구에는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