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조선은 붕당정치의 실세들이 군주의 권위 위에 군림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정조는 탕평정치를 표방하며 각 정파의 수장들과 소통하는 데 만전을 기했고, 공개토론장에서는 반대세력의 저항을 힘으로 억압하는 접근법을 꺼렸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정파의 지도자를 내세워 단숨에 문제를 해결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공개적인 토론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정 난제들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대신들에게 어찰을 보내곤 했다. 노론 벽파와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노론 영수인 심환지에게 어찰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의중을 관철시킨 정조의 리더십은 성군의 이미지에는 배치된다.

정조의 어찰 정치는 『삼국지』의 유비가 중시했던 덕치라기보다는 조조나 사마의가 추구했던 실리적인 통치술처럼 여겨진다. 그의 어찰에는 은밀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최고지도자의 승부욕이 깃들어 있다. 본래 어찰은 국왕의 서찰로서 어서御書라고도 한다. 개인 간에 주고받는 서찰과 달리 어찰은 국왕의 통치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공적 문서의 성격을 지닌다. 조선 초기부터 왕들은 어찰을 활용해 신하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곤 했다. 표면적으로는 임금을 비판하지만 은밀하게 임금과 소통하던 심환지는 의사결정의 적절한 타이밍에 정조의 견해에 동조함으로써 군주의 신뢰에 보답하였다. 심환지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어찰들을 노론의 핵심 세력들과 공유하며 대응책을 논의했을 수도 있다. 임금과 대신들이 참여하는 토론장에서 노론세력은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며 치열하게 대립하곤 했는데, 심환지는 정조와 노론의 당론 사이에서 이중플레이를 했을 수도 있다.

당시 정조는 남인세력을 키워주며 노론을 견제하였지만 영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노론세력을 제압할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정파를 초월하여 실력으로 인재를 선발하는데 주력했고, 노론이나 소론이나 남인에 안주하지 않는 진보적인 길을 선택했다. 학문적으로도 신하들을 압도할 만큼의 특출한 실력을 겸비했던 정조는 군사를 자임하며 자신의 탕평정치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정파를 초월하는 탕평책을 전개함으로써 정파간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또한 공정하고 마땅한 것에 준하여 논의하며 대응하는 정조의 탕평책(준론탕평)은 도덕적 가치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추구함으로써 정치적 명분을 확보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유교적 통치이념의 틀에 갇혀 있던 유학자들에게는 너무도 진보적인 접근법이었다. 불완전한 정조의 탕평책은 그의 어찰 정치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재임기간 내내 정적인 노론을 비판하면서도 노론의 수장과 은밀하게 소통하며 관계 개선을 추구했지만, 그가 서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노론은 그의 친위세력이 되지 못했다. 그가 쓴 어찰들 중에 외척인 홍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보낸 어찰이 가장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탕평책을 추진하면서도 외척들과 국정의 주요한 안건들을 상의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조어찰,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와 봉투 출처: K옥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