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며 실사구시를 내세운 실학사상은 18세기의 조선을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조는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군주였지만 실학의 가치를 접목함으로써 난제 해법 도출에 집중했다. 또한 실학을 경학의 본질로 인식함으로써 정조는 무기력해진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경학의 실학적 해석은 기존의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왕권 강화의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학문에 정진하는 것과 일을 도모하여 성과를 내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는 실용적인 접근법을 중시한 정조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대부들의 관행을 비판했다.

전통적인 유학자들이 득세하던 조선 전기에도 양성지를 비롯한 진보적 성향의 사대부들은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실용적인 학문 탐구를 중시했다. 이들은 보수적인 유교국가의 모순을 지적하며 사회 곳곳에서 제기되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도출하는 실용적인 연구를 중시했다. 하지만 유교국가로 출범한 건국 초기의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지지세력을 크게 규합하지는 못했다.

세상은 늘 변하기 마련인데, 조선의 권력자들은 건국 초기에서부터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실학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18세기 후반기에도 실사구시적인 사회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거센 저항 때문에 성과 도출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은 보수적인 사대부들의 관행을 뛰어넘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중앙부처의 요직에 대거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전통적인 사상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 확산에는 크게 기여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 출처: wiki

정조는 실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내기 위해 정약용을 발탁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과 정조의 소통 과정을 살펴보면 정조가 인식했던 실학과 서학의 깊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난 정약용은 성리학의 통치이념을 존중하면서도 실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실학, 즉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을 도모하는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통합적으로 접근했는데,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었다. 실학자들의 경제개혁은 토지개혁 연구에 집중되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경제적 기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제도화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 연구는 조선 중기의 실학 연구와 달리 서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정조는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만 조선이 보다 선진화된 사회로 도약할 수 있다는 비전을 설정했다. 하지만 천주교인들과 서양의 과학기술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과학기술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한계를 극복해야만 했다.

정약용은 혼란스런 현실을 접하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고 민생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남인으로서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고, 평등사상을 중시하는 천주학 연구에도 심취하였다. 다산이 추구한 실학에는 서학이 융합되었는데,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18세기의 시대적인 상황도 서학 연구에 관심을 고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당시 정약용을 비롯한 다수의 실학자들은 서학을 융합하여 성리학의 단점을 개선하고자 했다.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정조는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 해법을 도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곤 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한 오늘날에는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융합하여 급변하는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해법을 도출하는 사람이 융숭한 대접을 받지만, 당시는 사회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기득권 세력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천주학의 평등사상은 왕정국가의 정통성과 배치되었기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은 정해진 수순이 되어버렸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기理氣, 음양, 인간 심성에 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분출하고 있는 사회의 모순들을 치유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 와중에 정약용은 중국을 통해 전파된 서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조선의 실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교 경전에 제시된 천天사상의 본질을 부각시키며 성리학의 명료하지 못한 논리를 비판하였다. 또한 성리학의 천사상과 서학의 천사상을 비교·검토하여 무형적이며 관념적인 천관을 비판하고, 실질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유형적인 천관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이 추구했던 실학은 혼돈스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왕정국가의 정통성과 부합하기 어려운 서학의 부작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실학을 통해서라도 조선사회의 개혁을 갈망했던 정조였지만 성리학적 통치이념에 배치되는 서학의 평등사상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조 집권기의 사회변화는 되돌리기 어려운 거대한 물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