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을 진압한 후 영조는 새로운 정치실험에 나섰는데, 임금이 추구해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서 세종을 흠모했고, 수신과 치국에서 신하들을 이끌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미흡하나마 당파를 초월해 유능한 관료를 발탁했던 영조의 완론탕평은 붕당간의 대립 속에서도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의 탕평책은 당파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과격한 인물을 경계하고 온건적 성향의 인물을 등용하여 투쟁과 대립의 정치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집권 후반기인 1755년(영조 31)에 발발한 을해옥사(나주벽서사건)로 인해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하며 정국 혼란은 지속되었다. 이로써 영조의 탕평책은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되지 못한 채 노론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후 노론 세력은 김귀주계의 남당과 홍인한계의 북당으로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조선의 정치지형을 바꾸려 했으나 붕당세력의 냉혹한 권력투쟁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집권 말기에 영조는 노론세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고, 자신의 권력기반이었던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서거했다.

반면 정조의 탕평책은 붕당정치에 따른 폐단과 왕권의 몰락,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와 빈부격차, 신분제사회의 갈등 심화 속에서 지배계층의 안이한 대응과 서구문명의 유입에 따른 가치관의 혼돈을 치유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붕당정치의 갈등 속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미완으로 끝난 영조의 탕평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며, 왕도정치를 확립하고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합의 정치를 표방했다. 노론과 왕실 외척의 대립 속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정조는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고 외척을 경계해야 한다.’는 ‘우현좌척’의 정치론을 중시했다.

그는 영조대의 정치적 폐단을 치유하기 위해 선왕의 탕평책과 구별되는 준론탕평을 표방하였다. 각 당파의 온건파를 중용한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준론탕평은 붕당정치의 현실적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를 중시하고 정치적 이해집단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검증하며 화합의 정치를 실천하는데 주력했다. 1776년(즉위년) 9월 22일 정조는 탕평정치에 임하는 자신의 구상을 신하들에게 전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마땅히 용사(취함과 내어버림)하는 즈음에 ‘노·소老少’ 두 글자를 먼저 마음속에 두지 않을 것이고, 오직 그 사람을 보아서 어진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은 버릴 것이다. 대소 신료들은 또한 ‘노·소’ 두 글자를 마음에 싹틔우거나 입에서 꺼내지 말 것이며, 다시 바라건대 여러 신하는 내가 한 말이 오활하여 사정에 절실하지 않다고 하지 말라.” 정조는 각 당파의 구성원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왕도정치의 온전한 복원, 그리고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며 공존의 정치미학을 구현할 수 있는 인재 발굴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던 청렴한 선비들인 청류 세력은 노론, 소론, 남인 등의 계파별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정조의 탕평책에 호응하였다. 준론탕평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들은 외척 등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며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아울러 정조의 탕평책은 왕권을 강화하며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신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즈음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주자학만으로 조선의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간파하고, 노장사상뿐만 아니라 서학의 장단점을 분석하며 엄격한 신분제와 지주제를 중시하던 농경사회의 발전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농업생산성을 높여나갔고, 상업과 화폐경제의 확산으로 새롭게 부상한 역관, 서얼, 상인 등의 정치참여에도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정조 재임기인 18세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초석을 놓아야 하는 시기였는데, 천재 군주였던 정조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조선을 선진사회로 발돋움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쳤다. 당시 조선사회는 상업의 발전으로 인해 인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신분제에 기초한 봉건적 사회질서가 위협받던 시기였다. 인적 교류가 왕성해지면 잦은 분쟁은 필연적인데, 대립으로 인한 갈등보다는 소통과 민주적 의사결정에 의한 문제해결능력을 필요로 한다. 국제정치의 흐름을 간파한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한 조선사회의 화합과 인재 육성을 해결해야만 하는 당면과제로 인식했다. 그는 탕평책을 통해 단순히 왕권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일류국가로 도약해야 하는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