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추진했던 개혁정치가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면 조선의 국운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성리학에 심취해 있던 기득권 세력들은 정조가 서거하자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며 정조의 치적들을 지워버렸고, 조선의 국운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을 접했는데, 천주교의 이理적인 관점보다 과학기술적인 기器적 측면을 중시했다. 그는 1784년(정조 8)부터 1791년(정조 15)까지 천주교와 관련된 서양의 책들을 연구하였는데, 『천주실의』·『진도자증眞道自證』·『서학범西學凡』 등이 정약용의 개혁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쉽게도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의 개혁정치는 정조의 서거와 함께 중단되었다.

정조 집권기에도 독점권을 획득한 시전 상인들의 영향력 확대는 영세 상인들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그는 ‘신해통공’을 통해 시전 상인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난전 상인들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키며 상업질서를 바로잡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난전 상인들의 권한이 확대되자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양인 등의 사회적 영향력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불평등한 상업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정조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채제공은 1791년(정조 15) 6월 20일에 개선책을 제시했다. “요즈음 인심은 옛날 같지 않아서 이익을 독점하는 일만 추구하니 도거리 장사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도거리 장사를 없애지 않으면 백성의 풍속이 바르게 될 수 없고 백성의 살림이 넉넉할 수 없으며 장사치들이 통할 수 없고 저자(시장)가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 옛날 성군이 대궐 문 밖에 법령을 내걸던 전례대로 지금 입법한 내용을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어 항간의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몰라 죄에 걸려드는 근심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오륜행실도, 이병모 등이 왕명으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책하여 편찬한 수양서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조는 다각도로 검토한 후 전교하였는데,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불법을 방치하면 사회기강이 무너지는 부작용도 걱정하였다. 당시 도거리 장사의 폐단은 힘없는 상인들을 괴롭혔는데,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만큼 부작용이 심각했다. “반드시 일전에 땔감의 문제처럼 절대로 금지시키고 막아야 할 일로서 법사(형조·한성부)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백성이 지탱해나가기 어려운 문제라야만 비로소 이 금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누구나 다 이 금법을 환히 알게 하여 처음부터 법을 범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지금 이 금법을 만드는 조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이 어찌 공사간에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와 서양 사상이 혼재된 변혁기를 맞이하여 정조는 불완전한 신분제의 근간을 바로잡고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바로세우는 일이 시급했다. 그는 개인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삶의 지침서인 『소학』을 중시했으며, “정치를 돕고 세상을 권면하는 도구”로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한권으로 정리하여 『오륜행실도』를 편찬한 후 한글판 보급에도 힘썼다. 힘없는 백성들은 한자를 몰라 다방면에서 불이익을 받았는데, 정조는 훈민정음 활성화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당시는 남녀차별이 심했고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교육여건이 좋지 못했는데, 한글은 양반가의 여성뿐만 아니라 하층민들이 폭넓게 활용하던 글이었다. 따라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문서를 한글로 병기하는 정책은 힘없는 백성들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의 사회적 약자란 신분이 천한 사람일 수도 있고 부정부패에 고통받는 백성일 수도 있으며,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궁핍한 백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특히 흉년이 들면 전국을 떠돌며 구걸하는 사람들로 인해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다. 1798년(정조 22) 10월 21일 정조는 “선전관을 나누어 파견하여 도성 내외에서 의탁할 곳 없이 유리걸식하는 자들을 두루 찾아내 진휼청”으로 보내도록 조치하였고, <자휼전칙>과 같은 법령도 정비하였다. 본래 <자율전칙>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1783년(정조 7)에 만든 법으로 많은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여 반포하였다.

자연스럽게 정조 집권기는 한글 필사본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글로 만들어진 각종 문서와 책들이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한글 필사본은 꾸준히 보급되었지만, 정조대 이전에는 활성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쉽게도 개혁의 저항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채 과거로 회귀해버린 19세기 조선의 정치를 생각해보면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이 그립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정조가 추진했던 개혁정치의 핵심가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혁파함으로써 일류국가로 나아가는 것이었다.